위로

산문 2009. 12. 8. 09:40

"이거 쓰세요. 감기 들어요."

어느 날,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타려고 가는 길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적게 내리는 비가 아니어서 금방 나는 젖어버렸는데, 이미 젖은 마당에 비를 피할 것도 없어 단지 나무 밑에 서있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언제 일기예보를 경청하였는지, 저마다 우산을 들고 있었다. 우산이 없던 나는 그날따라 그것이 그렇게 서러웠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려는데, 웬 여자 한 명이 택시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그는 결국 택시에서 쫓겨나, 돌담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도 비는 내리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비를 맞을 때의 서러움이 떠오른 나는 그를 한참을 바라보다, 편의점으로 가서 우산을 사왔다. 그리고 그에게 건넸다.

우산을 건네고 가려는데 그가 쫓아와, 한사코 거절하며 우산을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약간 오갔고, 결국 나는 못 이긴 채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는 취했는지, 초면인 나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비를 맞던 내 자신을 생각하며, 한 사람을 위로하려고 했을 뿐인데, 어느새 내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었고, 더 이상 비를 맞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날은 내 친구에게 정말 억울한 일이 있던 날이었다. 내 소중한 친구는 한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억울해 했다. 나는 그에게 "그런 걸로 화를 내기에는, 억울해하기에는 너는 너무나 괜찮은 아이다. 가치 있는 아이다. 그러니 울지도, 억울해하지도 말아라."고 말했다. 얼 만큼 그가 그로 인해 위로를 받았을까.

나는 그때, 나의 위로가 충분치 않았음을 인정했다. 단지 달변가의 흉내를 내며 그를 설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위로가 필요하니 나는 설득해서는 아니 되었다. 나는 다짜고짜 그를 서점에 데려갔다. 나 같은 흉내쟁이보다, 더욱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의 책을 선물하고자 했다. 그 책을 선물 받은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그제야 그가 위로를 받았음을, 마음의 상처가 조금은 하얀 무언가로 덮여졌음을 알았다.

순간 나는, 내가 선물한 책의 저서가 쓴 또 다른 책을 전부터 사고자 했음을 떠올렸다. 그리곤 대번에 그 책이 있는 곳으로 가서 두 권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달려갔다. 그 책을 찾을 때 내가 위로한 나의 친구가 나를 도와주었음은 물론이다. 상처받은 그를 위로하고자 서점에 들렀는데, 어느새 내 손에는 평소에 갖고 싶었던 책이 들려있었고, 더 이상 어디에서도 그 책을 갈망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우산이 필요한 이에게 우산을 선물하려 했는데, 내 손에 우산이 들려있어 비를 맞지 않아도 되었고, 책이 필요한 이에게 책을 선물했는데, 내 손에 그토록 갈망하던 책이 들려 있었다. 내가 남에게 하려 했던 위로가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혹자는 "당신이 당신의 의지로, 당신의 돈을 주고 구매한 우산과 책인데 어찌 그것이 '선물'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는지 모른다. 돈을 주고 물건을 산다는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적으로 맞는 말이나, 인과적으로 생각한다면 선물임이 당연하다. 두 번에 걸쳐 크게 깨달은 나는, 내가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또 누군가가 나를 위로하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기해한다.

Posted by 심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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