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붙잡고

운문 2013. 5. 21. 14:13

전화기를 붙잡고


심준섭


건물에서 나와, 가동이 끝난 승강기를 지나

계단을 오르며, 어두운 와중의 가로등 불을 스쳐

사각의 건물들, 흐르는 노래들, 어두운 밤공기를 만나

주유소를 지나, 안경점을 지나, 문 닫은 빵집을 지나

비에 젖은 아스팔트, 미끌거리는 과속방지턱

닿아 버린 정류장, 도착한 집 방향 버스

창문을 열고, 세차게 스며드는 바람을 맞을 때

흘러가는 풍경, 움직이는 시야, 걸어가는 시간

집 근처 정류장에 내려, 보도블럭에 발을 올리고

편의점에서 차가운 맥주를 사고, 병뚜껑을 돌리고

메인 목을 녹이면, 다시 목이 메이고

걷다가, 걷다가, 집 앞에 도착해

계속 빙빙, 빙빙 돌다가

Posted by 심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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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학교생활

산문 2013. 3. 7. 13:29

작년 가을 때, 장편 수필을 쓰고 싶어 시작했는데, 사는데 치이고 삶의 의욕이 떨어지면서 중단 된 프로젝트입니다. 간만에 제 블로그에 공개해보아요.


연작 학교 생활

“김태장 장로님께서 그러셨어, 자식이 50살까지는 부모가 살아있어야 한다고, 그때까지 부모는 부모 노릇을 해야 된다고, 자식은 언제까지나 자식이라고.”

태어나서 딱 두 번째로, 아버지에게 뺨을 수 차례 두들겨 맞고 들은 말이다. 나는 아마, 1, 2지망 대학을 모두 떨어진 채, 컴퓨터를 하고 있다가 3지망 대학도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아버지께 대들었었다. 평생에 걸쳐 그 이전까지, 단 한번 매를 드셨던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이 대학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철없이 대드는 아들에게 느끼는 분노를 더해 매 대신 손바닥을 드셨다. 입안이 헐도록 두들겨 맞고 무릎 꿇고 앉아 저 말을 듣는데, 얼얼하고 화끈거리는 것조차 잊은 채, 나도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저 얘기를 꼭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이야기지만, 기억에 남는다. 가구의 배치도, 앉았던 의자도, 꿇은 무릎 앞에 있던 붉은 가죽 소파도 그 위에서 훈계하던 아버지의 표정도. 모두 기억에 남아있다.

교회 청소년 부 부원으로서 마지막으로 참가한 겨울 수련회. 그 수련회는 다른 교회 청소년 부와 함께 했던 이른바 합동 수련회였다. 그 친구들이랑은 기억에 2번째 만나는데, 그들의 교회는 시골 어딘가에 있어서, 한번은 우리가 찾아갔고 그 해 겨울에는 그들이 찾아왔던 그런 교류가 있던 곳이었다. 수련회라면 늘 시골만을 찾았던 우리들은 휴대폰을 빼앗긴 채, 나뉘어진 일정 금액만을 들고 서울의 여러 곳을 탐방하는 조금은 새로운 형태의 수련회를 경험하였다. 다른 지역의 아이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우리의 코스 중 마지막은 과연 남산이었는데, 다른 교회에서 온 이들 중 여간 꾀돌이가 아니었던 친구 한 명이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났다며 주저 앉아버렸다. 휴대폰도 반납했고, 마냥 어른들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것이 성미에 맞지가 않아, 2명을 먼저 위에 올려 보내고, 나는 다리에 쥐가 난 그 녀석을 업고 남산 빨간 벽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미련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 내 생각은 ‘네가 꾀병이면 내가 널 업는 모습을 보고 양심에 찔릴 것이며, 진짜라면 나에게 고마워 할 것이다. 두 가지 경우 모두, 너 혹은 나에게 좋은 경우가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친구의 속에 들어가 본 것은 아니나, 당시에는 약간 서로간의 그런 말 없는 감정이 이어졌다.

먼저 올라간 두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교회 선생님들이 하나 둘 내려오기 시작했고, 내 등에 업혀있던 친구를 들쳐 메고 올라갔다. 그러면서 나에게 소리쳤다.

“준섭아! 너 대학 붙었대! 어머니께 전화 왔다!”

교회 수련회에서 다리에 쥐가 난 친구를 업고 남산을 거의 다 올라왔는데, 갑자기 내가 대학에 붙었다니, 정신이 없었다. 붙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떨어질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그 때의 소감을 말하자면, 크게 기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하긴 했으나, 정말 솔직히, 기쁘지 않았다. 우선 합격한 대학 – 건국대학교 - 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 2지망으로 썼던 대학들이 이름값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는 더욱 나은 곳들이었고, 이 들이 하나, 둘 떨어지면서 뭔가 ‘재수를 하든, 반수를 하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붙든 안 붙든 오래 다닐 곳이 아니었다, 건국대학교는.

처음 대학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함께 교회에 다니던 시온이 누나가 이미 1년 전부터 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내가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굉장히 반가워 하며 나에게 길을 안내해 줬었다. 나보다 한 살인가가 많은 시온이 누나는 당시 교회 목사님의 딸이었는데, 함께 청소년 부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이 부대끼고 살았다. 그 당시 우리 교회는 청소년 부끼리 정말 친하였다. 서로가 가족 같았고, 일요일만 되면 정말 집에 가기 싫을 정도로 오래도록 놀았다. 축구도 자주하고 농구도 자주하고, 수련회 가기 전날이면 꼭 교회에서 잤다. 노래방은 빠지지 않고 갔다. 그 때가 참 그립다. 그 때의 친구들 중 누군가는 프랑스로 유학을 갔고, 지금은 결혼을 했다. 어떤 친구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영어강사를 하고 있고, 함께 간 그의 형은 아직 그곳에 있다. 그가 정말로 보고 싶다. 어떤 이는 군대에 갔고, 그리고 제대를 했다. 지금은 모두들 자주 만나지 못한다. 강렬한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을 정도의 진한 유대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시온이 누나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우리 교회는 분가선교를 지향하는 교회라 일정 숫자가 넘으면 목사님과 분가를 희망하는 몇몇 교우들이 함께 새로운 개척교회를 만드는데, 당시 교회 목사님의 딸이었던 시온이 누나는 그의 오빠인 연용이 형과 함께 새로운 교회로 가게 되었다. 환송회를 하면서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는데, 코 옆의 교회를 가는 그 둘을 안으며 왜 그리 울었던지 모르겠다.

“건대 입구 역 말고, 어린이 대공원 역으로 와~”

어린이 대공원 역 3번 출구로 나와 한참을 걸어가니 시온이 누나가 있었다. 시온이 누나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남기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짓던 그 미소를 띄우며 나를 반겼다. 여기는 어디고, 저기는 무엇이며, 나는 저 건물에서 수업을 들으니, 우리 종종 만나서 점심을 먹자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함께 대학을 다니던 1~2년 간 그리 많은 점심을 먹진 않았다. 함께 대학을 다닌다고 해서, 그리 자주 만나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입학한 과는 공과 대학 소속의 토목환경공학부였다. 정확히는 과가 아니라 두 과가 합쳐진 학부였으므로, 우리는 2학년 때부터 토목공학과와 환경공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실은 1학년 때부터 ‘환경반’, ‘토목반’으로 나누어져 수업을 따로 들으므로 1학년 때부터 대충은 과가 정해진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사실은 모든 궁금한 사항을 토목공학과 학회장에게 물어보고 입할 정도로 내가 입학한 과를 아예 토목과인줄 생각했는데, 예비 대학 때 어떻게 친해져서 수다를 떨던 녀석이 환경반 쪽에 줄을 서길래 나도 그냥 그렇게 줄을 서버렸다. 아무렴 어떠랴, 오래 다닐 대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도 겁 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사실 환경공학과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환경운동 비슷한 것 하겠거니 생각했다. 어차피 오래 다닐 대학이 아니었다.

“너 공무원은 안 어울려. 무슨 공무원이야, 넌 좀 더 활동적인 일을 해야지!”

삼수를 해서 나보다 2살이 많았던 은혜누나를 우린 ‘형’이라고 불렀다. 은혜형은 웃음이 시원시원하고 간지럼을 많이 타는 형이었다. 그리고 생각이 깊었다. 친구 핸드폰으로 형에게 장난 전화를 걸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 은혜형은 내 장난에 속아 벌벌 떨면서 전화를 받았다. 아마 휴대전화 요금 미납이 있다든지 하는 가벼운 것이었는데, 왜 그리 긴장하면서 받았는지 모르겠다. 웃음을 참기 힘들어 내가 장난 친 것임을 고백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었었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았지만, 훨씬 순수한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재수를 하든, 반수를 하든’ 하던 마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새로운 노력을 하는 것이 두려운 현실에 놓여있었다. 어쩌면, 애초에 나에게 그런 의지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새로운 대학에 가고 싶었는가? 나에게 ‘좋은 대학’을 위해 1년을 더 투자할, 그냥 보내기만 하면 되는 1년이 아니라, 더욱 치열하게 노력해야 하는 그런 1년을 보낼 야망이 있던가? 나는 그런 사람인가?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한 해를 투자하겠다는 약속은 나에게 한 약속이 아닌 나의 부모님께 드린 것이었다. 그들의 불만족을 잠시나마 완화 시키기 위한 기만이었다. 서울 사대부고에 입학하시고도 남들이 인정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던 아버지가 원했던 대리만족, 그것에 대한 실망을 조금이나마 숨겨보려 했던 노력이었다.

“행정 고시를 볼 테니, 반수는 포기할게요. 대학 친구들이 너무 좋아요.”

한번 더 도망쳤다. 반수를 하겠다는 약속보다도 더욱 과감한 눈가림이었다. 20살이었던 나는 29살인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안정을 찾던 중이였어서, 공무원이라는 철밥통의 매력을 갓 알게 되자 마자 그것을 목표로 삼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9급, 7급이 있다고 했고, 5급도 있다고 했다. 5급 공무원이 되려면, 행정 고시라는 것을 봐야 한다고 했다. 반수를 하겠다는 약속, 아니 아버지에 대한 농간을 덮기 위해선 보다 큰 카드가 필요했다. 덕분에 무사히 부담감에서 잠시나마 도망칠 수 있었다. 쉼 없는 도망, 단지 그 뿐이었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공무원을 네가 왜 해?”

망치로 머리를 한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충격이었다. ‘되고 싶은’ 것이 없던 나에게 있어서 너무도 큰 자극이었다. 나는 맹세코 그 날의 거리와 날씨와 공기의 냄새와 땅의 무른 정도와 행인의 많고 적음을 생생히, 모조리 기억한다. 그 거리는 어느 안경점을 끼고 지나는 모퉁이였고, 날씨는 맑았지만 공기에선 쌀 냄새가 났었다. 깨진 회색 타일 바닥을 지나면서 시꺼먼 아스팔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날 은혜형이 던진 그 한마디는 그토록 매섭게 가슴을 후볐다.

“왜?”

목적 없이, 되는대로, 상황에 맞춰서 입학한 대학임에도 현실을 인정하지 못했고, 아니, 어쩌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해 도피하듯 시작한 국면을 피하기 위해 원치도 않았던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고, 그 목표가 거짓이었음을 무마시키기 위해 새로운 지향점을 꾸며냈다. 그것들을 억지로 창작해 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당장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도 꾸며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받고서야, 심지어 꾸며냈던 목표마저 나의 성향과 완벽히 달랐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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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코 사이에

운문 2012. 4. 9. 19:49

눈과 코 사이에

 

눈과 코 사이에, 뜨거운 것이 있어

그것이 나오려고 한다.

이것은 지금 나올 일이 없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웃음을 판다는 생각을 한다.

내 웃음을 팔아서 내가 유지 된다는 생각을 한다.

 

내 웃음은 본디 부터 끊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끊이지 않는 것,

조금은 떼어내 팔아도 관계 없다 생각했다.

그렇듯 내 웃음의 가치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어느 순간 나는 종종,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웃음을 다 써버린걸 느꼈지만, 그럼에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야말로 눈물에 웃음을 빚진다.

이것은 마치, 은행빚과 같아, 언젠가는 터지게 된다.

웃음 빚을 눈물로 많이 져

지금 그것이 나오려고 한다.

Posted by 심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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